조치원 정수장 카페 / 세종시 근대건축물 / 이색 카페 가볼만한 곳
- 직장인 생활/소비 리뷰
- 2021. 12. 30. 15:19
한국에서 모든 지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조치원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에요. 서울로 향하는 기차들이 지나치는 곳이기도 하고, 국어 교과서에도 기형도 시인의 유명한 시가 있지요. 조치원 정수장은 몇 년 전에 근대건축물에 관심있었을 때 들렀던 곳입니다. 2003년도까지 실제로 정수장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인지 보존상태는 좋았지만, 그 이후 눈에 띄게 낡아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었죠. 하지만, 이번에 카페로 새단장했다고 해서 방문해 봤어요.
▼ 기형도의 시 조치원
조치원(鳥致院)
- 기형도
사내가 달걀을 하나 건넨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1시쯤에
열차는 대전에서 진눈깨비를 만날 것이다
스팀 장치가 엉망인 까닭에
마스크를 낀 승객 몇몇이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 뱉아내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서울에서 아주 떠나는 기분 이해합니까?
고향으로 가시는 길인가보죠,
이번엔, 진짜, 낙향입니다.
달걀 껍질을 벗기다가 손끝을 다친 듯
사내는 잠시 말이 없다.
조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죠, 서울 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조치원도 꽤 큰 도회지 아닙니까?
서울은 내 둥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방 사람들이 더욱 난폭한 것은 당연하죠.
어두운 차창 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간이역에서 속도를 늦추는 열차의 작은 진동에도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람들. 소지품마냥 펼쳐보이는
의심 많은 눈빛이 다시 감기고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투리처럼 몸을 뒤척이는 남자들.
발 밑에는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곤 하였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가.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사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번 열어보인다.
플랫폼 쪽으로 걸어가던 사내가
마주 걸어오던 몇몇 청년들과 부딪친다.
어떤 결의를 애써 감출 때 그렇듯이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시간은 0시.
눈이 내린다.
최근 대전역 근처의 소제동을 중심으로 카페거리가 생겨나고 있는데요. 조치원 정수장도 그런 것인가 했는데, 소제동은 외부 자본이 들어와서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을 새로 리모델링하고 있는 반면, 조치원 정수장은 아무래도 세종시에서 위탁한 것인지(?) 최소한의 개조만 하고 원형은 유지하는 거 같아서 근대건축물 보호론자인 저로서는 매우 흡족했습니다.
숨겨진 공간에 일부 미술전시도 하고 있었어요.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나요? 조치원 정수장 건물 그 자체와 그 안에 숨겨진 예술작품을 찾아내고 소통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상시 전시된 것인지 아님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2층(1.5층?)에는 정수장이라는 취지를 살린 바테이블과 좌석이 있었고요. 아싸인 저는 저 커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웠고요. INTP인 저는 사진촬영이라는 목표만 달성한 후 바로 나와서 근처 별관에서 쭈구리처럼 커피를 마셨습니다.
조치원 정수장 카페 메뉴
가끔 혼자 이런 오래된 건물에 있을 때는 이 공간에 모든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1935년도에 기초를 다지고 벽돌을 쌓는 순간부터 정수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수선공들의 모습, 전쟁의 포화 속에서 중단된 채 방치되었다가 다시 재가동되어 제역할을 하다가 수명을 다하고 2021년의 우리 앞에 카페로 단장해 여기까지 와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건축물도 사람과 같이 생멸이 있으나 그 수명을 주관하는 것은 결국 그 건물에 깃든 사람이겠지요.
문득 류근 시인의 시가 떠오르네요. 지금 조치원은 세종시에 밀려 그 위상이 많이 낮아졌지만, 한 때는 어린 아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짜장면 집이 있었던 도회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봅니다. 그 아이가 살던 가난한 집은 사라졌지만, 가난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네요. 톱밥같이 쓸쓸한 청년들이 다시 결의에 차서 날아오르기를 바라며 이상 조치원 정수장 카페 방문 후기를 마칩니다.
▼ 류근 시인의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 류근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도립병원
철조망 아래 우리 집은 그 여름이 다 가도록 비에 잠기고
생각에 잠긴 지붕마저 선착장 유람선처럼 흘러가고
빚쟁이도 고지서도 쳐들어오지 않는 날들은 평화로웠네
비가 오면 조금씩 흘러가 마침내 주소마저 지워져 버리는
우리 집 서쪽에는 항상 시청 철거반 합숙소가 있고 일요일
오후에 건빵 가져다주던 박 대위 아저씨 하숙이 있고
우리 큰누나 재봉틀에 매달려 일하던 모자 공장 그 건너
방죽에는 패랭이꽃 달맞이꽃 온갖 주인 없는 꽃들이 피어
갈 데 없는 마음들과 놀아주었네
백동전 서너 개만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소년중앙
별책 부록을 끼고 차창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는
도회의 유복한 소년처럼 한나절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했네 조치원역에서 내려 짜장면 한 그릇만 먹어봤으면
하루라도 포만과 감미로운 피로에 젖어 잠들 수 있다면
이 세월 빨리 건너뛸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날마다 비는 내리고 기차보다 빨리 흘러가 버리는
우리 집 지붕을 붙들고 서서 나는 쓰르라미처럼 울었네
온갖 고통이 문패를 달고 세월을 밀고 갔네 그너머
추억에는 온종일 비가 내리네 아주 흘러가 지상에서 사라진
우리 집 지붕 위에 내 눈물 아직도 비를 맞네